경리단길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셋째 날

셋째 날 아침엔 해가 비쳤다.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어 을밀대 평양냉면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느긋하게 숙소를 나섰다.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는 메시아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일본가정식을 먹었다.

매일 메뉴가 바뀌고 단일 메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을 줄 알았는데, 데리야끼 덮밥과 고로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데리야키 덮밥을 선택했고 둘 다 만족했다. 맛있었고 과일까지 깔끔한 한 상을 즐겼다. 한 달 동안 일본에 출장가 있던 시절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 때는 매일 저녁마다 덮밥에 생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이 쏠쏠했다는.

식사 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숙소에 비치된 앨범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평소에 들어보지 않은 음악인데 마음에 들어서 애플뮤직에서 찾아 보관함에 추가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면 경리단길에서 보내는 여름휴가를 추억하게 되겠지.

카페에서 책을 읽을 요량으로 오후 2시쯤 다시 길을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 동네 풍경이 달라보였다. 더웠지만 습도는 상대적으로 높지 않아서 불쾌하진 않았다.

사장님이 너무 친절하셔서 기분이 좋아지는 버클리커피소셜을 첫째 날에 이어 다시 방문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에 단골손님, 이웃가게 사장님 등이 찾아왔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정겨워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기 시작할 무렵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사업부에서 업무 관련 전화가 왔고 개발 일정 관련 민감한 대화가 오갔다. 명확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이 문제였고, 지나간 일은 잊고 해결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사에 계신 분들께 부탁할 수 밖에 없어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휴가기간만이라도 회사일은 잊고 지내고 싶었는데 지나친 기대였을까.

통화 후에도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잠깐 쉬다가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는데 태어나서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던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 내렸던 기억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베트남 음식 전문점 띤띤. 베트남에 가본적은 없지만 가게에 들어와 있으니 베트남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 음식과 하노이 맥주의 궁합은 완벽했고 특히 분짜가 정말 맛있었다. 며칠 동안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즐기다보니 싱가포르 여행이 떠올랐는데 굳이 음식 때문이라면 싱가포르에 갈 필요가 있을까 싶을정도로 경리단길에선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홍콩음식 완차이야
  • 일본가정식 메시야
  • 영국가정식 블루밍런던
  • 베트남음식 띤띤
  • 그리스음식 엘그레코스
  • 프랑스음식 장진우식당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나란히 손을 잡고 이태원 해밀턴호텔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걷기에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무리는 감자전에 막걸리로.

이제는 우리동네 같은 장진우거리에서 야경 한 장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여러 번 연락온 것이 옥의 티라 할 수 있겠으나 모처럼 아내와 긴 시간 함께 보내며 잘 쉬었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라는 박민규 작가의 글을 떠올리면서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 우리 둘 앞에 놓여질 시간도 언제나 휴일이었으면 좋겠다.

경리단길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첫째 날

아내와 나의 여름휴가는 점점 정적으로 변해 가는 듯 하다. 2년 전엔 제주도에 가서 차도 빌리지 않고 한동네에서 7박 8일을 보냈고, 작년엔 네스트 호텔에서 말 그대로 그냥 쉬었다. 올해는 경리단길 근처 에어비앤비 숙소를 빌려 3박 4일을 자유롭게 보내고 있다. 배고프면 먹으러 가고 졸리면 자고 몸이 찌뿌둥하면 산책하러 간다.

휴가지로 떠나는 방법은 5007번 버스. 3박 4일 일정이라 작은 캐리어를 들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남산체육관 정류장에 내려 달동네의 가파른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우리가 묵을 그랜마 스테이에 도착했다.

숙소는 마음에 들었다. 큰 창문 옆 원형 테이블에 앉아 턴테이블(TEAC LP-P1000)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짐을 풀고 동네를 둘러 보았다. 숙소에서 녹사평역 입구까지는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던 맛집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중 하나였던 홍콩 음식점 완차이야에서 완치이야 플래터를 먹었다. 솔직히 기대만 못했다. 다음에 온다면 새우탕면이나 마카오볶음면을 먹어보고 싶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어렸을 때 다녔던 유성유치원을 둘러 보았다. 건물의 형태만 흐릿한 기억속에 남아 있을 뿐이어서 큰 감흥은 없었다.

경리단길에서 숙소로 향하는 경사는 어마무시하다. 지인들에게 어렸을 때 이태원 달동네 살았는데 경사를 뛰어 내려가다 멈출 수 없어 넘어졌고 그 때 가난을 알았다는 이야기를 우스게 소리처럼 하곤 했는데, 정말로 나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숙소에 돌아와 코세라 머신러닝 프로그래밍 숙제를 하다가 입이 궁금해 다시 길을 나섰다. 어디 맥주 한 잔 맛있게 할 수 있는 곳 없을까 고민하다가 찾은 곳은 크래프트웍스 남산점.

일요일 밤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어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였지만, 맥주도 음식도 연애하던 그때처럼 맛이 좋았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남산 그랜드 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중간에 숙소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걸었다. 복잡한 달동네지만 신기하게 하루만에 금방 적응이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라 그런걸까.